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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사라진 대화 끝 – 공허의 형상

by 비판텐 2025. 4. 17.

 

 1. 말이 끊긴 순간, 감정이 시작된다.

 

한때는 쉴 새 없이 말을 나누던 사람이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해도 웃기만 했고, 사소한 농담도 진심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대화가 자연스럽게 끊겼다. 그 사람은 그대로 내 앞에 있었지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말의 잔향, 무언가를 말해야 할 것 같지만 아무 말도 적절치 않다는 침묵. 우리는 그런 순간에 맞닥뜨리면 당황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 침묵이야말로 감정의 밀도가 가장 높은 순간일지도 모른다. 말이 사라졌다는 건 전하고 싶은 것이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혹은 너무 많아서 감히 꺼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말을 멈춘 자리에 남은 건 오직 감정뿐이다. 텅 비어 있는 듯하지만, 그 안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마음들이 소용돌이친다.

 

 

공허함이란, 그저 없음의 상태일까

 

 

2. 공허는 어떤 표정으로 찾아오는가

 

공허함이란, 그저 없음의 상태일까? 아니면 있었지만 사라진 상태일까? 대화가 끝났을 때 느끼는 공허함은 그저 혼자라는 느낌보다 더 깊은 것이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끊김은 더 아프고 생생하다. 전화를 끊은 뒤, 화면이 꺼지는 순간 단체 대화방에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나가는 손가락 더 이상 답장을 기대하지 않는 채로 남겨진 말풍선 이런 장면들 속에서 공허함은 얼굴을 드러낸다. 표정은 없지만, 느낌은 명확하다. 마치 뜨겁던 물이 식고 나면 남는 온기처럼, 그 감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계속 주변을 맴돈다. 공허함은 무감각한 듯하면서도, 사실은 아주 민감하게 우리 마음을 휘감는다.

 

 

3. 우리는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말이 끊긴 대화에서 가장 괴로운 건,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어야 했을까 라는 후회다. 기회가 있었던 것 같고, 뭔가 더 말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순간 그때는 입을 열지 못했고,지금은 기회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침묵의 잔재는, 내 안에서 오래도록 멤돈다. 말을 하지 못한 이유는 많다.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내 진심이 왜곡될까 봐, 혹은 이미 틀어져버린 관계를 더 어지럽힐까 봐. 하지만 그 어떤 이유보다도 큰 건, 우리가 서로를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무의식 중에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말이 사라진 건,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이미 멀어졌다는 신호였다.

 

 

4. 공허 속에서 다시 나를 마주하다

 

할 말이 사라진 뒤, 남는 건 침묵이다. 그리고 그 침묵은 고요한 거울이 되어 나를 마주하게 만든다. 나는 왜 그렇게 느꼈을까? 그 사람과의 대화에서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내가 기대한 건 대체 뭐였을까 공허함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돌아볼 기회를 주는 감정이다. 그 순간에는 너무 허무하고 허탈하지만, 그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된다.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아도 되는 사이, 혹은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멀어진 관계를 정리하며 나는 내가 원하는 연결이 어떤 모습인지 배운다. 그리고 다음 대화에서는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공허함은 단지 끝이 아니라, 다음 감정을 위한 여백이다.

 

 

 할 말이 없어서 조용한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런 순간,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한다. 대화가 끊긴다는 건 관계의 죽음을 뜻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침묵이 필요한 시간일 수도 있다. 그동안 말로만 채워왔던 관계 속에서 진짜 마음은 미처 전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공허함은 그렇게 말하지 못한 감정들의 무게다. 그 무게를 견디는 건 아프지만, 결국은 나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든다. 말이 끝났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그 자리에 남겨진 침묵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관계를 정리하고, 감정을 기록하며, 자신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