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하루가 너무 조용한 날 – 무심함과 멍함 사이

by 비판텐 2025. 4. 18.

무심함가 멍함 사이

 

1. 감정도 스위치를 꺼둔 듯한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조용한 아침이었다. 바깥의 소음도, 내 마음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출근 준비를 하며 샤워를 하고, 커피를 내리고, 익숙한 동작들을 반복하면서도 마치 내가 아닌 누군가의 하루를 빌려 사는 느낌.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그냥 멍하다. 그런 날은 뭔가 문제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사실 특별히 문제는 없다. 다만, 마음에 약한 정적이 깔려 있을 뿐이다. 마치 감정의 볼륨이 0으로 내려간 느낌. 조용하고, 납작하고, 무던한. 그 감정의 이름이 딱 떠오르지 않아서, 더욱 어색하고 낯설다.

 

 

 

2. 무심함이라는 보호막

이런 조용한 하루는 종종 무심함 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다.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차단하듯 멀어지는 감각. 사람들의 말에 크게 반응하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큰 파도 없이 넘어가는 하루. 무심한 상태는 때때로 마음의 방어기제다. 지치지 않기 위해, 아프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감정을 멀리 두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심함이 오래가면 그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된다는 점이다. 그 속엔 사실 말하고 싶은 감정들이 뭉쳐져 있다. 누군가와 깊은 얘기를 나누고 싶고, 사실은 오늘 아침 작은 일이 서운했지만 말하지 않고 묻어두는 선택을 반복하다 보면 감정 자체가 점점 무덤덤함 이라는 이름으로 뒤덮인다. 무심함은 일종의 보호막이다. 하지만 보호막은 오래 쓰면 숨이 막힌다.

 

 

3. 멍함의 정체는 과부하일지도 모른다.

멍하게 있는 나를 두고 누군가 무슨 생각해하고 물어본다. 하지만 나조차 모른다. 진짜 아무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생각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건드릴 수 없는 상태. 멍함은 종종 과부하 상태일 수 있다. 하루하루를 쉴 새 없이 살아내며, 쌓이고 쌓인 감정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져 뇌가 스스로 꺼짐 모드로 들어가는 것. TV를 켰는데 화면만 나오고 소리는 꺼져 있는 상태. 눈앞의 세상은 움직이는데, 나는 그 안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는 듯한 이질감. 그런 상태에서는 모든 게 흐릿하고, 사람의 말도 천천히 들리는 것 같고, 내가 내 감정을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이 멍함은 나약함이 아니라, 감정 소진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이 상태를 자책하기보다는 하루쯤은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여야 한다.

 

 

4. 조용한 하루가 전해주는 작은 신호들

그 조용했던 하루의 끝에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바쁘고 복잡했던 날들 사이에 끼어든 이 조용한 하루는 나에게 아주 작은 신호를 보낸다. 잠깐 멈춰도 괜찮다. 지금 이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도 괜찮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감정은 늘 선명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렇게 흐릿하고 무채색인 날들이 내 마음의 숨을 돌리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하루가 너무 조용한 날은, 마치 큰 비가 오기 전의 고요함처럼 내면의 움직임을 준비시키는 시간이다. 그 날을 억지로 채우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있는 그대로 두자. 무심하게, 멍하게, 고요하게. 그러다 보면, 어느 틈에 감정의 기류가 다시 흐르고, 사라졌던 말과 웃음도 서서히 돌아올 것이다.

 

 감정 도감의 회색 페이지 이 날의 기록은 형체도 없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감정이 없다는 게 아니라, 지금은 감정이 쉰다는 뜻. 바쁘게 살아온 마음이 잠시 멈춰 선 날, 그 조용함 속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감정을 삼켜왔는지를 비로소 느끼게 된다. 무심함과 멍함 사이. 그 사이의 공간은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정을 위한 여백이다. 혹시 오늘이 그런 하루인가요? 그렇다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 감정을 이렇게, 조용히 적어두는 것도 분명히 나를 지키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