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끝내고 난 뒤, 오히려 조용해지는 마음
허무함은 이상하게도 끝에 온다.해야 할 일을 끝냈을 때,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을 때, 오래 기다리던 무언가가 지나간 뒤에 찾아온다. 기다렸던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는 영화관처럼. 선물 포장을 뜯고, 안에 뭘 받았는지 확인한 직후처럼. 마침표를 찍은 그 순간, 마음은 조용해진다. 기쁜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고, 그냥 텅 비어 있다.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을 때, 나는 그게 허무함이라고 느낀다. 아무 일도 없는 고요함이 아니라, 무언가 있었는데 사라진 자리에 나만 남아 있는그 기이한 공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 감정은 뭔가를 이룬 뒤에도, 잃은 뒤에도 온다. 성취와 상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가끔은 둘 다 아닌 것처럼 위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허무는, 생각보다 자주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허무함은 마음에 구멍을 낸다 .
허무함이 진짜 무서운 건, 그게 조용히 스며들기 때문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뭐든 할 수 있었던 날인데, 딱히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계획을 세우고, 스케줄을 정리하고, 깔끔한 하루를 보내려 했지만, 어느 순간 이걸 왜 하지라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그 의문은 생각보다 무겁다. 몸도 마음도 천천히 가라앉는다. 허무함은 마치 정리된 방 한가운데 생긴 작은 구멍 같다. 처음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물건들이 그 구멍으로 빨려들기 시작한다. 의욕도, 집중도, 감정도, 모두 사라진다. 남는 건 나뿐이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내가 된다. 그래서 허무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감정이다. 슬픔처럼 눈물을 흘리게 하지도 않고, 분노처럼 터지지도 않지만 무력감이라는 이름으로 마음 전체를 잠식한다.
허무함 속에서 나를 마주하는 법
처음엔 허무함을 없애려 했다. 바쁘게 움직이고,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지만, 그럴수록 허무는 깊숙한 곳에 숨어들 뿐이었다. 외면할수록 더 커지고, 피할수록 더 자주 나타났다. 그래서 어느 날은 그냥 가만히 있어보기로 했다.허무함이라는 낯선 감정을 마주하고, 그 속에 들어가 보기로 한다. 그건 마치 공기가 없는 공간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숨을 쉬면 내 숨소리만 들리고, 눈을 감으면 나 자신만 보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도 없지만,거기엔 내가 있다. 오로지 나만이 존재한다. 그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허무함은 내가 나를 재정비하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감정들이 떠나고 난 뒤에야 보이는 것이 있다. 그동안 무시해왔던 감정, 억지로 눌러온 생각, 정말 원하던 것과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는 깨닫게 된다. 허무함은 내 안의 울림 없는 방과 같다. 그리고 그 방에 오래 머물수록, 나는 나를 또렷이 만나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도 의미는 있다
허무한 날들은 흔적이 없다.사진도 없고, 누군가와 나눈 대화도 없다. 그냥 지나가버리는 날, 그냥 잊혀지는 하루지만 그 안에는 분명 내가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기록하고, 기억하고, 증명하려고 애쓰는 동안 텅 빈 하루는 실패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허무한 날도 살아 있는 하루다. 무의미해 보이는 순간에도, 그 안에 의미는 숨어 있다. 허무함은 감정의 휴식기일 수도 있다. 불꽃처럼 타올랐던 감정이 식는 시간이고, 혼란했던 마음이 고요해지는 시간일 수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조용히 다시 중심으로 돌아간다. 무언가를 새롭게 채우기 위해, 잠시 비워내는 시간이다.
허무함은 겁낼 필요 없는 감정이다. 그건 나를 무너뜨리는 감정이 아니라,다시 정비할 수 있도록 멈춰주는 감정이다. 텅 빈 공기 속에 나 혼자만 가득 찼던 순간. 그건 외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진짜 나를 가장 깊이 만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다음번에 허무함이 찾아오면 나는 조용히 그 공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려 한다. 그 안에는 어쩌면, 내가 잊고 있던 나의 목소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