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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도감 – 조용한 분노의 형태

비판텐 2025. 4. 11. 11:13

1. 소리치지 않았다고, 화나지 않은 건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화를 내지 않으면 괜찮은 거 아니야? 하지만 그 말이 얼마나 단순한 오해인지, 조용히 분노해본 사람들은 안다. 분노는 반드시 소리를 동반하지 않는다. 때로는 고요한 숨소리,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너무 평온해서 더 무서운 침묵으로 다가온다. 나는 종종 소리를 지르지 못한다. 화를 낼 줄 몰라서가 아니라, 화를 내면 모든 것이 무너질까봐 두려워서다. 그래서 마음속에서만 수없이 되뇌인다. 이건 아니잖아. 이건 나쁜 일이잖아. 나는 지금 화가 났어.하지만 겉으로는 조용하다.내 말투는 부드럽고, 표정은 무표정이고, 행동은 조심스럽다. 그런 날이면, 나는 마치 조용히 우는 사람 같다. 소리는 없지만 눈물은 흐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분노를 머금은 채 무너지고 있는 사람같다.

 

조용한 분노의 형태

 

2.분노는 종종 마음 깊은 곳에서 자라난다.

조용한 분노는 대부분 축적에서 온다. 작고 불편했던 일들, 넘긴 말, 참았던 감정들이 마음 안에 쌓인다. 마치 찬장이 꽉 찬 줄도 모르고 그 안에 계속 쟁여두는 것처럼 쌓아간다. 처음에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나만 예민했나 저 사람도 힘들었을 거야. 지금 말하면 상황만 더 복잡해질 거야등등 이렇게 감정을 눌러두는 시간이 길어지면,내 마음속에는 작은 균열이 생긴다. 그 균열 사이로 분노는 조용히 스며든다. 처음엔 그게 분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똑같은 상황이 반복 될수록 나는 점점 참는데 익숙해지는 대신 상처받는데도 익숙해진다. 조용한 분노는 뿌리를 내려버린다. 감정은 무뎌지고, 말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감정은 점점 내 존재 일부가 된다.

 

3. 소리를 내지 못한 감정은 어디로 갈까

말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감정은 몸에 남는다. 식욕이 줄거나, 괜히 혼자 있는 시간이 싫어지거나, 혹은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게 되거나, 나는 분노가 쌓였을 때, 자주 감정의 무감각을 느낀다. 화가 난 건 분명한데, 이게 슬픔인지, 외로움인지, 짜증인지 헷갈린다. 그저 내 안에 무거운 것이 하나 놓여 있는 느낌이다.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마구 쏟아질 것 같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다. 그래서 가끔은 혼자서 조용히 운다. 감정을 소리로 꺼내지 못했기에, 눈물로라도 배출해야 하는 것 같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게, 그렇게 나는 조용히 무너지고, 다시 조용히 일어난다. 조용한 분노는 그렇게 나 혼자서 감당하는 감정이다.

 

4. 조용한 분노를 마주하는 용기

이제는 그 조용한 분노와도 대화하고 싶다. 그 감정도 결국 내 편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했을 때, 내가 너무 참기만 했을 때, 그 분노는 나를 지켜주기 위해 일어난 감정이기도 하다. 감정은 억누르는 게 아니라, 마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용한 분노를 기록한다. 그날 있었던 일, 들었던 말, 느꼈던 감정을 조용히 써내려간다. 마치 감정에게 네가 있다는 걸 알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때론 분노를 표현하는 것도 용기다. 무례한 말에 단호하게 그건 기분 나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계선인 것이다. 그걸 넘어서지 않도록 조용한 분노는 오히려 나에게 경고해주는 신호다. 더 이상 감정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조용한 울음에도 귀 기울이기로 했다. 내 안의 분노에게 고맙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분노는 반드시 큰 소리로 터질 필요가 없다. 말없이 울고 혼자 앓고 묵묵히 삼킨 감정들도 분명히 우리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 조용한 분노는 약한 게 아니다. 그건 어쩌면, 가장 오랫동안 나를 지켜낸 감정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내 안의 울음을 다독인다. 소리는 없지만, 그 감정은 분명히 살아 있고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중이다.